[추모]5.18 그리고 4.3: 우리는 그들의 피 위에 서 있다 – 수다피플






4·3에서 5·18로



 

문화방송이 ‘엠빙신’으로 타락하기 10여 년 전인 1999년, 당시로선 제목조차 도발적인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다큐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역사 다큐멘터리 보는 걸 즐겼던 아버지 덕에 이 다큐를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1회 타이틀이 ‘제주 4·3’이었다. 고향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임에도 어른들에게 4·3에 관해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나로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이제사 말햄수다”, “4·3을 말한다” 등의 책들을 찾아보았고, 아버지가 4·3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울 어무니와 외삼촌들이 본인들의 할아버지 형제들을 왜 그토록 원망하고 있는지 역시 알게 되었다. 울 어무니의 할아버지 형제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당시 사상적 유행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귀국해서는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좌익 활동을 하다 4·3에도 깊숙이 관여를 했다고 한다. 그 후과는 잔인했다. 가난과 차별과 감시. 그 잔인한 세월을, 후손들은 숨죽여 견뎌야만 했다.

 

4·3에 대한 관심은 곧 현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90년대 후반만 해도 국정 국사교과서엔 현대사 분량이 극히 적었고, 학교에서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학생들 입장에서도 공부할 분량이 늘어나는 걸 원치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궁금하면 알아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고 되레 그런 열악한 환경이 뭔가 내밀한 걸 홀로 알아낸다는 희열을 선사하기도 했더랬다.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거대한 조류가 바로 5.18 민주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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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의 기간, 희생자 수 등 규모의 면에서 4·3 항쟁에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건 4·3 사건이 일어난 지 한 세대가 지난 1980년, 그것도 컬러사진이 보편화 된 시기에 이 처참한 비극이 벌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당시 사진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심정을 잊을 수 없다.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와 이 기막힌 역사에 대한 슬픔이 밀려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더라. 20년 가까이 흐른 뒤 본 내가 그러했을진대, 그 시절을 공유했던 당시 청년들이 이 사진을 숨죽여 보았을 때 받았을 충격이야 말해 무엇 하겠나. 모두가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을지언정 저 잔악무도한 군부독재 세력을 끌어내고 혁명을 쟁취해 내는 꿈을, 그 시절의 청년들은 한 번쯤은 꾸었을 거다.

 

 

4·3과 5·18, 박정희와 전두환



 

이승만 정부는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 증파를 결정했다. 이때 파병 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가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봉기해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숙군 작업을 감행하는데, 형 박상희의 영향으로 남로당 활동을 하던 박정희는 군부 하부조직책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만주국 시절 인맥인 백선엽과 김창룡 등에 의해 사형을 면한 뒤 형식적인 재판 끝에 강제 예편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으며, 이후 정보국 문관을 거쳐 한국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체포 당시 군부 내 남로당 명단을 순순히 넘긴 점, 일제강점기 시절 인맥과 한국전쟁이라는 혼란상이 그의 부활을 도왔던 셈이다.

 

부활한 박정희는 10여 년 만인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이었던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했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지지 시위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던 육사 교장 강영훈을 음해하여 구금에 이르게 하고 결국 육사 생도 지지 시가행진을 이끌어 낸 것이다. 민심이 쿠데타에 우호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결정적이었던 이 시가행진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눈도장을 단단히 찍었고 곧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박정희의 권유를 마다하며 군대 내에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한 전두환은 박정희의 묵인과 방조, 비호 하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육사 11기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육사 정규 4년제 졸업생이었던 전두환은 생도 시절부터 ‘5성회’ 따위의 친목 파벌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는 ‘하나회’라는 무소불위의 사조직으로 변질되어 박정희 사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끔찍한 살육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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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공약 제1항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였다. 이는 4·3 사건으로 비롯된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자,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데 그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방식을 더욱 강화하여 사용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변절자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더욱 악랄하게 구는 것과 같은 이치다. 18년 철권통치를 곁에서 지켜봐 온 전두환이야 박정희처럼 레드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니라 거칠 것이 없었다. 보고 배운 대로 실행에 옮길 뿐이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이에 반대하는 광주의 민중들을 총칼로 잔혹하게 살육했다. 그리고는 이를 ‘불순분자들의 폭동’으로 치부해 버렸다. 4·3 사건과 5·18 민주화 운동은 서로 무관하지 않으며, 박정희와 전두환은 별개의 인격이 아니다.

 

 

80년대를 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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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태극기 아래에서 국민의례를 했다. 80년 5월 광주에서는 태극기가 관을 싸고, 시신을 덮었다. 태극기 아래의 그들은 국민이었으나 국민이 아니었고, 주권자이나 주권자가 아니었다. 취임사에서 “정의로운 새 사회와 부강한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적 사명이라고 한 전두환은 대통령이나 대통령이 아니었고 인간이나 인간이 아니었다. 이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순은 처절하고 끈질긴 저항을 낳았다. 4·3을, 5·18을 입 밖에 내기 저어해하던 어른들은 브라운관 속 자욱한 연기를 숨죽인 채 보았고, 30원짜리 눈깔사탕 하나 입에 가득 물고 쪽쪽 빨아대던 나는 던지면 불길이 확확 솟는 소주병이 신기해 뒷마당 소주병을 던져 깨다 어무니한테 얻어맞기도 했다. 그 불길과 연기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모순을 목도하는 순간 어떤 누구라도 화염병을, 횃불을 들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자연스런 저항의 흐름을 두고 저치들은 남한에 침투한 간첩이나 ‘북괴’와 선이 닿아있는 불손한 세력들이 선동한 결과라 왜곡하고 또 왜곡했다. 그 왜곡을 위해 고문하고, 죽였다. 그러나 너무도 빤히 보이는 그 불구덩이 속으로, 앞서서 나간 이들을 따라 산 자들이 걸어 들어갔다. 80년 5월 광주에서 산화해 간 그들을 떠올리며, 목숨은 그저 잠시 빌린 것뿐이란 결기로 싸워나갔다. 동네 친구들과 모기약 살포 트럭 뒤를 쫓아 뛰어다니던 나는 그 ‘혁명의 시절’의 주역은 아니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해하니 4·3 사건의 주역들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대’를 전면에 내세우며 ‘야만’을 일삼았던 부당한 권력에 대한 못마땅함, 그리고 저항.

 

 

진정한 ‘애국자들’을 추모하며



 

박정희에서 전두환, 군부 세력 노태우, 3당 합당의 주역 김영삼으로 이어진 정권은 잠시 자유주의적 민주개혁 세력인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넘어갔다가 천박한 장사치 이명박, 혼이 비정상인 박근혜로 이어졌다. 전두환을 오빠라 불렀다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촛불시민의 힘으로 탄핵되었고 구속 수감 중이다. 그 와중에도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라고 주장했고, 간난신고 끝에 대통령이 된 문재인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광주 영령들 앞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5·18 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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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링크)


여전히 4·3 사건을 남로당 세력의 적화야욕이 낳은 좌파들의 만행이라 싸잡아 비난하는 이들이 있고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이 침투하여 자행한 폭동이라 치부하는 자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 역사적 맥락과 당시 민의를 완전히 무시한 사견에 불과하고 후자의 경우 수구 세력의 소망이 병적으로 반영된 집단적 병리 현상의 소치라 볼 수밖에 없다. 4·3 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절 기념식 경찰 발포 사건 당시 참가자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고,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도청 앞 분수대에는 대형 태극기가 덮여 있었다. 저들은 주권자로서, 불의한 세력에 맞섰고 조국을 지키고자 했다. 일제에 부역하고, 독재 세력에 고개 조아리며 제 입신양명에만 골몰했던 기생충들 따위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그 숭고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다. 쓸 데 없이 비장한 거 싫어하지만, 분명히 난 저들의 피 위에 서 있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제주의 투사들과 광주시민들의 땀 위에 서 있다.

 

고맙습니다. 제주의 영혼들이여. 광주의 영령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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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깃한 기타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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