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너뷰]끝나지 않은, KTX의 취업농단史: 유니폼 없는 4000일 – 수다피플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은 생존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노동권 혹은 생존권을 위해 투쟁한다.


2005년 시작된, 코레일에 대한 KTX승무원의 투쟁도 그렇다. 코레일 측의 교육과 감독을 받았지만 간접고용 형태로 일해야 했다. 직접고용을 요구했고, 2006년 해고되었다. 투쟁은 계속되었지만 성과는 없었고, 2008년 소송에 들어갔다. 각각 2010년과 2011년에 있었던 1, 2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2015년 대법원에서 모든 게 뒤집혔다. 20대의 대부분을 길거리에서 보낸 대가는 파기환송이었다. 그리고 투쟁을 시작한 지 4000일도 넘은 지금, 그들은 여전히 해고상태다.


투쟁 후 맞는 네 번째 정부이자 새 정부가 들어섰다. 흐름이 심상치 않다. 왠지 이 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람과 기대 속에서,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의 김승하 지부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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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타쿠(이하 챙):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김승하 KTX열차승무지부장(이하 김): 안녕하세요. 전국철도노동조합 KTX열차승무지부장 김승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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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일종의 취업사기


챙: KTX승무원들의 정규직화(코레일이 승무원들을 직접고용하는 것)를 원하는 걸로 알고 있다. KTX승무원 비정규직에 대한 개념부터 잡고 가는 게 좋겠다.


김: 2004년 초에 고속열차 승무원을 공개 모집했어요. ‘KTX 승무원이 되기 위해서’ 이력서를 내고, 시험보고 면접도 봤죠. 거의 항공사 준비하던 친구들이라 다 여기저기 원서를 냈었는데, KTX가 제일 먼저 발표가 났었거든요. 다들 민간 기업보다 철도청이 낫지 않겠냐고 해서 선택했죠. 훨씬 더 안정적이고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을 했고.


처음에 철도청의 자회사인 ‘홍익회’에 1년 계약직으로 일하라고 하더라고요. 홍익회 직원이 되기 위해서 거기 지원을 한 게 아니었지만, IMF 이후에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었고, 외주위탁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도 잘 없었던 때라 그 부분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을 안 했어요. 채용할 때도 철도청 사람이 있었고, 철도청 사람이 교육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일도 같이 했고, 저희 징계도 했었고.


2004년엔 철도‘청’이라서 “공무원 티오가 안 난다. 지금은 자회사로 1년 계약직으로 임시적으로 고용하는 거지, (2005년에) 철도청이 공사화가 되면 당연히 정규직으로, 철도공사로 채용할 거다”라는 얘기를 들어 왔어요. 근데 공사화가 됐는데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싶었죠. 홍익회가 꼭 우리를 관리하는 것처럼 하니까.


그때부터 ‘불법파견’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당시 KTX 열차엔 팀장님 한 분, 승무원 세 명이 탔어요. 팀장은 철도공사 소속이고 승무원들은 홍익회 소속이었는데, 철도공사 소속인 팀장님이 이미 안전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같은 일을 하면 업무가 중첩이 되는 거예요. 업무가 같으니 도급을 주는 게 불법이 되잖아요(합법이기 위해서는 업무가 완전히 분리가 되어야 한다). 팀장님이 승무원들을 지휘감독을 하면 이것도 불법인 거고요. 철도공사에서는 이걸 합법도급이라고 하기 위해 일부러 ‘승무원들은 서비스만을 담당한다’고 얘기를 했어요. 근데 일을 하다보면 절대 서비스 업무만 담당할 수는 없어요. 불법이라는 말이 자꾸 나오니까 홍익회에서는 “(열차)팀장님들은 다른 회사 사람이다. 너네 인사도 하지 말고 소통도 하지 말아라”라고 지침을 내리고 그랬죠.


그러다 노조가 생겼고,


김: 2005년에 노조가 결성됐어요. 사실은 스스로 한 게 아니라 홍익회에 어용노조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입을 하면 노조비를 내야 하잖아요. 그거를 받으려고 승무원들을 일괄가입을 시킨 건데, 계기야 어찌됐든 지부장, 대위원 같은 자리가 생기고, 체계가 생긴 거죠.


홍익회 노조는 어용이라 어느 순간 사측을 대변하고 있더라고요. 노조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에 힘들어 할 때, 철도노조 분들이 이 쪽으로 옮기라고 하셨어요. 바로 옆 사무실이 철도노조 사무실이었거든요. 찬반투표 후 거의 만장투표로 옮겼어요.


2005년 말부터 서울역에서 집회를 한다든지, 선전물을 나눠준다든지, 약간의 투쟁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 2006년 3월 1일에 철도노조가 파업에 들어갔고, 저희도 같이 들어갔어요.


그들은 파업을 시작했다.



4000일이 넘었다


KTX 승무원들의 투쟁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 시작 ~ 소송
· 소송 ~ 대법원 판결
· 대법 판결 이후



1) 파업의 시작


챙: 서론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얘기해보자. 시작부터를 간결하게 읊으면.


김: 앞에서 말했듯, 2005년 말부터 약간의 투쟁을 하다가, 2006년 3월 철도노조와 같이 파업에 들어갔어요. 같은 달 승무원 350여 명이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 점거농성에 들어갔죠. 이 때 밖에 못 나가고 한 달이나 있었어요. 3월이잖아요. 엄청 추웠는데, 따듯한 물을 끊어버렸어요. 근데 추운데도 샤워는 해야 된다고 해서 찬물로 샤워하고 그랬죠. 문 잠가놓고 개수대에서 바가지로 물 퍼서 씻고. 입고 다니는 조끼에 항상 샴푸린스 넣어놓고 한쪽에는 스킨로션 넣어놓고…


챙: 점거 농성한 게 2006년 3월 9일, 같은 달 말엔 폭력진압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김: 네. 당시 철도청 사장이었던 이철 사장과 면담을 하러 갔는데, 경찰을 불렀어요. 다 몰아내고 자기는 유유히 빠져나가는 그런 모습을 연출했죠. 처음 전경을 만난 건데, 뜯기는 건 물론 성추행도 당하고 그랬어요. 다들 심리적으로 힘들었었죠. 많이 나가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건 2006년 4월 국회 헌정기념관 점거농성 때에요. 저희가 인원이 많아서 15~18명씩 조를 짠 뒤 조별로 움직였거든요. 헌정기념관엔 대여섯 개 조가 갔는데, 가기 전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고 얘기를 듣긴 했는데, 경찰이 본보기를 보이려고 그랬는지 들은 것보다 훨씬 못되게 굴었어요. 저는 사수조랄까, 밖에서 정찰을 했는데, 점거 들어가니까 경찰들이 건물 자체를 봉쇄를 했어요. 물도 밥도 다 통제를 해버린 거죠. 그리고 거기가 대리석 바닥이라 4월인데도 굉장히 추웠어요. 찬기가 올라와서 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너무너무 힘든 상황에서 하루를 보낸 거예요.


그리고 나서 경찰서로 연행해 갔는데, 보통은 24시간이면 풀어주거든요. 근데 48시간을 꽉 채우게 했어요. 사회초년생 애들이 잘 모른다고, 너네 이거 하면 빨간 줄 간다고 협박도 하고. 들었던 것과 다르고, 강압적이니까 애들이 공포에 질린 거예요. 한참 뒤에 점거조였던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기억이 없다고요. 하나도 없대요. 싹 지워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밖에 있었지만, 내 친구가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거를 보고만 있어야 하잖아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힘든 거예요. 시간이 백 년이 흐르듯 느껴졌죠. 아직도 이 날 기억이 저는 제일 힘들어요.


챙: 이 뒤에 해고를 당한 건가.


김: 해고는 2006년 5월 19일에 당했고, 직전에 강금실 선대본에서 농성을 했었어요. 헌정기념관 때 친구들이 상처를 받고 많이 나갔던 터라 이 때는 자원을 받았죠.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친구들만 들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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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원 전 지부장

ⓒ 매일노동뉴스


이 때 첫 지부장이었던 민세원 언니가 삭발단식을 했어요. 띠 매고 삭발하는데 너무 힘들었던 게, 머리 민다는 게 쉽지 않은 거잖아요. 더군다나 승무원이잖아요.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머리카락 하나를 소중하게 하는 사람들이 삭발을 한다고 하니까, 언니의 지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결의가 더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더 힘들고 많이 울기도 했고.


그 며칠 뒤에 승무원 280명이 정리해고를 당했죠. 홍익회에서 승무원만 떼어서 다른 자회사인 코레일관광개발 이관한 다음에 승무원들한테 또 다른 자회사로 가라고 하는데, 그럼 파업한 이유가 없잖아요. “직접고용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사람들이 해고됐죠.


챙: 처음엔 350명 아니었나?


김: 그렇죠. 처음엔 그랬는데 해고된 건 280명이에요. 경찰과 부딪히고, 점거 들어간 때 격렬하게 하기도 했고. 힘들어하고 나가버린 친구들이 많았어요. 물론 회사 쪽에 복귀한 친구들도 있었고. 해고 이후로도 많이 줄었어요. 1년 안에 350명이 100명까지 줄었죠. 갑자기 절망감이 확 올 때가 있어요.


우리는 최대한 합의를 하려고 2008년 소송하기 전까지 투쟁을 계속 했어요. 경찰에도 세네 번 끌려갔었죠. 소송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한 번 해보자”고 기운을 낸 게 올라갔던 게 고공농성이었어요. 근데 이걸 해도 해결이 안 되니까, 내려오고 나서 바로 소송에 들어갔죠.


그 안에도 협상이 있었는데, 이철 사장의 마지막 협상안이, 철도공사에 역 계약직으로 가는 거였어요. 알겠다고 협상하고 합의까지 했는데, 이철 사장이 그걸 깨고 철도공사를 나가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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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왜 정규직을 원하는 것인가


챙: 정리하고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정규직을 원하는 건가.


① 안전


김: 파업을
하면서 저희가 내세웠던 주장이 “KTX승무원을 철도공사가 직접고용하라”였어요. 안전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직접고용 승무원이
되어야 하니까요. (당시는 ‘홍익회’라는 자회사에서, 현재는 ‘코레일 관광개발’이라는 다른 자회사에서 KTX 승무원을 간접고용하고
있다)


챙: 안전과 직접고용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김: 철도는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한 번 잘못되면 사고가 크게 나니까. 혹시나 사고가 났을 때 마지막에 처리하는 게 승무원이거든요.
승무원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안전장치 중에 하나인 거죠. 그런데 이것이 안전해, 됐어, 라며 처리를 해버리는 거예요.
국회에서 발의된 ‘생명안전업무에 대한 외주화 금지법’에 열차승무원이 빠져있긴 한데,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캠프에서 “승무원
업무도 생명안전업무이기 때문에 직접 고용을 해야 한다”고 답변 한 적이 있어요. 이런 걸 봐도 승무원 업무는 마지막 보루로
남겨둔 안전의 일부인 거죠.


근데 지금 승무원은 안내하고 인사하는 거 밖에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문제가 생겼을 때 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자회사에 있는 한 안전담당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간접고용 형태로 있는 한 안전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요. 자회사에서 지금 어떻게 하고 있냐면, 안전 매뉴얼을 갖다놓고 읽고 여기에 사인하라고 해요. 아무도 안 읽죠. 안전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교육한 것도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수당을 챙겨줘야 하죠. 이게 또 비용이잖아요. 안 시켜서 내는 벌금이 시켜서 내는 수당보다 적으니까 안 시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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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계속 진행 중인 KTX 외주화와도 연결할 수 있는데요, KTX의 외주화가 다른 외주화와 차별되는 점이 ‘안전’이에요.


안전이라는
게 사실 티가 안 나요.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허술한 지 안 한 지 드러나는 건 큰 사고가 났을 때에요. 대형사고가 나기
전에 전조증상이 있다고 하잖아요. 하인리히 법칙(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지금 그만큼의 자잘한 사고가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어요. 근데 인명사고가 없다는 것 때문에 보도가 안 되죠.
열차가 고장나서 지연되는 일도 많아요. 복도에 서 있다가 KTX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쓰러지셔서 뇌진탕으로 실려 가신 분도 있어요.
이것도 제가 건너 아는 사람이라 알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왜 급정거를 했는지, 어떻게 사람이 다쳤는지, 처리는 어떻게 됐는지.
이렇게 안 알려진 사고들이 굉장히 많은데, 언급이 안 되니까 다들 KTX는 평화롭게 운행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죠.



② 책임소재


챙: 안전 문제 말고도 또 무슨 문제가 있나?


김: 책임 문제도 커요. KTX 같은 경우는 승무원들은 안전 담당이 아니잖아요. 사고가 나도 책임이 없어요. 먼저 도망가도 책임이 아닌 상황인 거죠.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아요. 작년에 김천역에서 선로유지 보수하시던 분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분들도 외주화
노동자분들이거든요. 원래 열차가 안 다니는 시간이라 일을 하고 있는데, 경주에서 지진이 나서 열차가 늦게 출발했다는 연락을 못
받으셔서 돌아가셨죠. 처음 교육 받을 때 “KTX는 300km가 넘기 때문에 저 밑에서 점으로 보여도 이미 늦은 거다. 다음에
바로 눈앞에 와 있다.”고 배워요. 근데 이 분들은 더 큰 사고를 예방하려고 선로에서 리어카를 치우다가 피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철도공사는 업무 매뉴얼 안 지킨 거라고 넘어갔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어요.



③ 권리


김: 승무원의 권리를 위해서도 중요해요. 얼마 전 코레일관광개발 내 성희롱 문제에 관한 기자회견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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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건설신문>


“수차례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됐던 관리자가 지사장으로 돌아와 이제는 여성 숙소 내 화장실 휴지통을 포함한 쓰레기에서 여성 용품을 분리수거하는 모습을 보여 여성 승무원들에게 성척 수치심을 줬다”



승무원을 자기 비서,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술자리에도 부르고 그래요.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뿐만 아니라 임금도 제대로 못 받아요. 지금 코레일관광개발 소속 신입은 최저임금 받거든요. 그것도 철도노조 코레일관광개발 지부에서 단협을 하면서 맞춘
거예요. 그 전엔 최저임금 이하였어요. 저희랑 같이 입사했던 분들 중에 (홍익회에서 코레일관광개발로 소속을 옮겨서) 아직도
일하고 계신 분들 있잖아요. 그 분들 벌써 경력이 몇 년이에요. 10년 넘었는데, 입사했을 때 받았던 월급 그대로 받고 있어요.
사실상 임금이 줄은 거죠.



2) 소송


챙: 드디어 소송이다.


김: 저희가 대법까지 7년 걸렸어요. 소송이라는 게 엄청 오래 걸리는 거기 때문에 계속 미뤘어요. 소송을 하지 않고 빨리 협상해서 돌아가서 일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다 기운도 빠지고 지치고 그랬을 때 마지막으로 한 거예요. 처음 350명에서 280명, 거기서도 줄고 줄어서 34명이 걸었죠.


2010년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을 이겼어요. 소송 들어가기 전 코레일 측과 했던 마지막 합의가 “법원의 판결이 나오면 그대로 따르겠다”는 거였는데, 코레일이 항소를 했죠. 다음 해인 2011년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도 이겼어요. 1, 2심 경우에는 이길 수밖에 없는 무궁무진한 자료가 있었어요. KTX승무원들이 (코레일 직원인) 팀장님하고 같이 일한다는 영상에서부터 철도공사에서 내려온 지침, 징계서류 같은 게 있었으니까.


챙: 2015년 문제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다.


김: 네, 2심에서 몇 년 지난 2015년 2월에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했죠.


대법원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열차팀장의 업무와 KTX 여승무원의 업무가 넓게는 KTX 차량이라는 동일한 공간 내에서 수행되고 서로 협조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각 업무의 내용이나 영역은 구분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열차팀장이 KTX 차량 전부를 순회·감시하면서 안전업무를 수행한 것과 비교하여, KTX 여승무원은 이와 별도로 각 담당 구간을 순회하면서 승객 응대 등의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각 위탁협약에 의하면, 화재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KTX 여승무원도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진압 및 승객대피 등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는 이례적인 상황에서 응당 필요한 조치에 불과하고 KTX 여승무원의 고유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았다.”


김: 판결에서 ‘승무원의 업무는 감독이 아니라 확인에 불가하다는 식으로 꼭 그렇게 못 볼 바 아니다’와 같은 식으로 빠져나가는 건 물론, ‘이례사항’이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죠. 다시 말해서 승객하고 승무원하고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만 보면 불법 파견이 없어요. 모든 걸 파견 할 수 있게 허용을 해주고 면죄부를 주는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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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챙: 판결 받고 기분이 어땠나?


김: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자꾸 웃음이 나요. 2015년에 한 인터뷰 동영상이 있거든요. 그걸 보면 제가 어이없어서 막 웃고 있어요. 너무 안 믿기고 비현실적이니까 웃음이 났나 봐요. 애들 옆에서 우는 거 보고 현실이란 걸 깨달았어요.


챙: 이 판결을 두고 “정치적 판단”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김: ‘그냥 정규직으로 고용하면 되는 거 아냐?’라고 간단하게 볼 수도 있어요. 근데 저희가 철도 민영화의 거의 첫 번째였거든요. 시작 단계. 이거 하나가 뒤집히면 모든 민영화의 스텝이 꼬이는 거죠. 저희가 워낙에 알려진 투쟁이다 보니 선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법에서 무리해서 판결을 내리지 않았나 싶어요. 박근혜 정부 때 나온 판결이잖아요. 압박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챙: 파기환송 이후 어떻게? 다시 항소를 한다던가?


김: 파기환송이라는 게, 저희가 승소한 게 잘못 됐으니까 고법에서 다시 판결하라는 거잖아요. 근데 고법에서 2015년 11월에 확정판결을 냈어요. 1심 파기 패소 판결이라고.


챙: 정말 날아간 건가?


김: 이것도 불복해서 대법에 항소할 수는 있어요. 고법과 대법 사이에서 핑퐁질을 하는 거죠. 근데 어차피 같은 대법원이고 이것을 항소해봤자 바로 기각될 거예요. 저희가 대법 판결 받는데 4년 걸렸지만, 이거는 바로 기각처리 될 거다 싶었죠. 오히려 확인사살 될 거라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재심을 고려는 하고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거는 그렇게 어렵기 때문이에요. 재심청구한다는 게 아주 결정적인 증거가 있지 않는 한 웬만하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챙: 대법원 판결에서 승무원 1인당 8640만 원의 부당이득을 반환하라는 말이 나온다. 어디서 나온 돈인가.


김: 저희가 한 소송이 ‘근로자지위확인 청구소송’인데, 2008년 12월에 가처분신청을 했어요. 이 때 ‘KTX승무원은 철도공사 직원이 맞다’고 가처분신청이 인정이 된 거죠. 그래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취지로, 2008년 12월부터의 임금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나온 거예요. 이 때부터 2012년까지 4년 동안의 임금이 8640만 원인 거고.


챙: 2012년 12월은 어떻게 나온 기간?


김: 2010년에 1심에서 승소했잖아요. 여기서 승소 판결을 받은 게 처음 소송을 했던 34명인데, 34명이 1심에서 이긴 걸 보고, 전에 나간 친구들 있잖아요. 해고된 280명 중 코레일관광개발로 안 간 친구들 100여 명이 다시 모여서 2차로 소송을 했어요. 그 친구들이 1심은 이겼는데 2012년 2심에서 패소했어요. 1차는 고법을 이겼는데 2차 애들은 2012년 12월 고법에서 패소를 한 거죠. 그러면서 철도공사의 입금 지급도 중단됐죠.


챙: 1차, 2차 소송이 연결되는 건가?


김: 어차피 같이 해고를 당하고 같은 일을 겪은 거니까요. 그 사람이 조합원이다 아니다, 투쟁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지 사건을 당한 피해자인 건 똑같잖아요.


이후 철도공사가 1차(2심까지 이긴 34명)를 대상으로 대법에 항소를 했고, 2차 애들은 승무원들이 항소를 했어요. 그래서 대법원에서 1차와 2차를 묶어서 2015년 2월 26일, 한 번에 판결을 냈죠. 집에 가라고. 이긴 1차는 “승소한 게 잘못됐다”고 해서 파기환송을 시켰고, 2차 애들은 항소기각을 했어요. 그래서 2008.12~2012.12 4년 동안 받았던 8640만 원을 뱉어내라고 한 거고.


챙: 이자 때문에 8640만 원이 계속 늘어난다고.


김: 최연혜 당시 사장이 내용증명을 발송한 때(2016/4/12)부터 5% 이자가 붙기 시작해서, 2017년 1월 홍순만 사장이 지급명령신청 소송을 건 후부터 15% 이자가 붙기 시작했어요. 한 달에 1인당 108만 원씩 붙어요. 지금은 빚이 1억이 넘었죠. 아직 한 명도 안 냈어요. 낼 돈도 없지만, 내는 순간 내가 잘못한 거라고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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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 판결 있은 지 얼마 뒤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김: 소송에 들어간 34명 중 한 친구가, 대법원 판결 후 보름 만에 목숨을 끊었어요. 10년 동안 어려웠던 일을 다 같이 버틴 34명이었기 때문에 강한 애들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친구가 그렇게 된 걸 저희도 한참 뒤에 알았어요. 서울역, 부산역에서 일·월요일에 하는 1인 시위의 순번 정하고 일정 짜느라 연락을 하는데, 언젠가부터 그 친구가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전화번호도 없어지고. 그 친구랑 친한 조합원이 수소문해서 그 친구의 언니를 찾았어요. 그랬더니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하더라고요.


철도노조에 ‘순직자부조금 제도’란 게 있어요. 조합원이 사망하면 1만 5천 조합원이 2~3천 원 씩 부조금을 걷어서 유족에게 지급하는 제도에요. 부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사망진단서가 첨부되어야 해요. 부조금을 전달하기 위해 남편 분을 만났더니, 사실대로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그걸 알고 저희도 많이, 네, 그랬죠. 당시 3살 된 딸을 두고 돌아가실 만큼 힘들었는데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는 데에 죄책감도 컸고. 안타까운 건 조합원 분 빚이 상속이 됐거든요. 아파트가 그 친구 명의라서.


아이가 되게 어리잖아요. 남편 분하고 저희하고 계속 연락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남편 분이 “이 아이한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이가 세 살이어도 느낀대요. 엄마가 지금 어디 가서 못 오는구나, 내가 엄마를 찾으면 안 되는구나, 본능적으로 느껴서 아빠한테 엄마 얘기를 한 번도 안 했대요.


나중에 아이가 다 알 수밖에 없잖아요. 아이가 엄마의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옳은 일을 했다는 명예회복, 엄마가 부당한 일을 당했고 끝까지 싸우다가 죄책감 때문에 혼자 안고 가려고 했었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3) 판결 이후


챙: 판결 이후가 새로운 막인 것 같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4000일 넘는 시간 동안 일상을 어떻게 살았나. 생계도 생계고, 재취업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김: KTX승무원으로 2년 반 일하고 파업만 했으니까 경력단절이 되더라고요. 이력에 KTX를 쓰면 파업했다는 것도 바로 나오니까 안 좋아하고. 면접 볼 때 “KTX 때 파업했는데 우리 회사 와서도 파업하는 거 아니야?” 묻는대요. 지금 다른 일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경력을 이용했다고 하기 보단 인맥을 통해서? 아니면 다른 창구를 통해서. 가정주부가 제일 많고요.


그게 아닌 사람은 파업을 하면서 철도 비정규직 기금 같은 걸 이용해서 1인당 한 달에 50만 원씩 받는 걸로 살았죠. 저희가 정리해고 된 다음엔 실업급여를 3개월인가 6개월 받았고. 중간에 일일주점도 하고 사업도 했어요. 양말도 팔고 장사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적어도 50만 원 받았는데, 사람이 빠져나가면서 7-80만 원이 되기도 하고. 이 돈으로는 생활이 유지가 안 되잖아요. 정말 돈을 벌어야하는 친구들은 나갔어요. 집에서 돈 달라고 안 해도 되고, 혼자 몸 건사할 수 있는 친구들만 투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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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국회 진입을 시도하다 저지당하는 KTX승무원들

ⓒ연합뉴스


챙: 사람들의 시선도 쉽지 않았을 것 같고.


김: 떼쓰면 정규직 되는 줄 아냐는 얘기도 들었어요. 을지로위원회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던데(김 지부장은 같은 날 오전 을지로위원회에 다녀왔다), 다른 사람들은 시험 봐서 공채로 코레일 직원이 된 건데 너희들은 비정규직 되기 더 쉽지 않냐, 어째서 정규직을 원하는 것이냐,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얘기를 할 것이냐, 고 물으시더라고요. 근데 좀 억울하거든요. KTX승무원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들어간 거지, 제대로 공채로 시험 봐서 뽑았으면 당연히 그 길을 택했겠죠.


지금은 비정규직, 간접고용 같은 게 워낙 많아서 저희를 보는 시각이 나아졌지만, 한창 싸울 때만 해도 아니었어요. 모두가 어려워져서, 이제야 너희들이 왜 그랬는지 알겠다는 분들이 생기고. 저희를 좋게 생각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도 고마운 일이긴 한데, 사실 슬픈 얘기죠. 다들 공감하고 있다는 거니까.



김 지부장은 가볍게 말했지만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 어째 쉬이 여겨지지 않았다.


챙: 원하는 게 이제 ‘정규직’만은 아닌 것 같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해달라. 


김: 요구안을 세 가지로 정리를 했어요.


① KTX 승무업무를 철도공사로 이관

② 해고승무원 철도공사로 복직

③ 가처분지급금(8640만 원) 환수 철회


소송한 34명 뿐 아니라 지금 코레일관광개발에서 일하는 승무원들과도 연관이 돼요. 저희가 원하는 건 승무직 자체를 철도공사에 이관하는 거니까요.


챙: 철도 전체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김: 그렇죠. KTX는 승무원을 시작으로 선로 정비, 지방 같은 경우는 이미 정비 일부가 외주가 됐어요. 역 직원도 거의 없어졌고, 발매 다 외주화 됐고요. 표 파시는 분 중에 철도공사 직원은 없어요. 개찰구도 없애버리고 다 열차 안에서 검표하잖아요. SRT는 철도 기장, 운전하시는 분 빼고는 다 외주라고 들었어요. 외주화라는 게, 10~20년 지나도 임금이 변하지 않는 일자리잖아요. 이것 때문에 KTX 승무원이 패소한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철도청의 부활까지도 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챙: 캠프 시절부터 접촉이 있었던 걸로 안다. 현 정부의 태도는?


김: “전향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게 문구에요. 정규직이 된다고 하면, 대통령이 선심써주듯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동안 싸울 수밖에 없었던 목표와 우리가 잘 싸웠다는 걸 인정받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챙: 마지막으로 할 말은.


김: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4000일 넘게 싸울 수 있었냐고 물어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너희 너무 순진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의가 승리한다고 믿었던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에 버텼던 게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세상에 찌들고 더러운 건 피해가면서 사는 게 삶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절대 이렇게까지 못했을 거예요. 부양가족이 없는 몸이기도 했기도 했지만, 순수함을 갖고 있어 싸울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복직 이후로도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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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본을 다시 맬 수 있을까”

ⓒ시사IN


김 지부장은 “잘 돼서 예쁜 유니폼 입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보이기 시작한 희망 때문인지 얼굴 표정은 꽤 밝아보였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들이 코레일에서 직접 지급한, 코레일 소속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걸 금방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생각에서 그치질 않길 바라본다.




편집부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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