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칼럼]대립군: 스스로 서야 했던 사람들의 영화 – 수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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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대립군>을 굳이 보자고 한 건 소재 때문이었어. 광해군의 ‘리즈 시절’, 즉 그 일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보고 싶어서였지. 임진왜란 발발 후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린 나라와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를 달린 조선의 지배층에서 보여 준 광해군의 활약은 언제든 영화 소재로 마땅하다 싶었으니까.

영화 속에서 광해군은 강계로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강계에서 일본군과 한판 전투를 치르지. 실제로 광해군은 선조에게 강계로 가라는 어명을 받고 있었어. 그런데 강계는 설한령 고개 하나 넘어 함경도에 접했던 곳이야.

함경도 점령을 맡은 일본군 장군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군 지휘관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했고 심지어 두만강 너머 여진족까지 건드리기도 할 정도로 사나운 자였어. 개마고원 쪽으로는 진출하지 않았지만 광해군의 형까지 포로로 잡은 가토가 조선의 왕세자라면 당연히 군침을 흘릴 것이니 강계는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지. 또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 분조의 임무라고 할 때 강계는 후방 중의 후방이었고 말이야.

그래서 광해군은 영화에서처럼 강계에서 조선군을 규합한 게 아니라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적진을 돌파하는 일대 강행군을 펼치게 돼. 평안도 영변을 출발해서 낭림산맥을 타고 남하해서 강원도 이천까지 온 거야.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편안한 행차가 아니라 특공대의 산악행군에 가까운 고생이었다. 임금 행차에 돌을 던지기도 하고 무기를 들고 피난길을 막기도 했던, 세상 없는 하늘처럼 굴던 양반님네들이 귀신보다 빠르게 도망하는 모습에 분노하며 치를 떨던 백성들은 열여덟 왕세자의 딸기 같은 상큼한 활약에 감동하게 돼.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쳤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해져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


대통령 하나 바꾸니 별 일이 다 생긴다는 푸념은 그다지 정확한 얘기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린 얘기가 아니야.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함경도와 강원도의 접경에 있었던 이천에 광해군이 좌정하여 의병을 호소하고 수령들의 귀환을 촉구하자 도망갔던 수령들이 전립끈 질끈 동여매고 자기 동네 관군들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의병을 일으켰거나 그럴 것을 고민하던 선비들은 광해군의 교지를 앞에 놓고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부르쥐었다고 해.


 “세자 저하가 이러시는데 어찌 우리가…”


온 나라에 바람이 불었다고나 할까. 산속에서 보리쌀 생으로 씹으며 목숨 건진 것 다행으로 알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팔뚝질이 오가기 시작했지.


 “세자 저하가 저러시는데 너는 뭐하는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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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단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의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는 그 집단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이건 케케묵은 영웅 사관이 아니라 우리가 지난 몇 년 동안 체득한 현실적 판단이야. 광해군이 강계로 들어가 틀어박혔다면, 선조가 그예 압록강 건너 망명 정부(?)에서 안전하게 지냈더라면 아마 임진왜란 때 이미 조선은 일본의 일부가 됐을지도 몰라. 그 과정을 그린 영화라는데 어찌 놓칠 수 있었을까 말이야.

결론적으로 영화는 내 ‘관람 의도’와는 달랐어. 광해군의 활약보다는 그 전 단계, 이정재 이하 대립군(代立軍), 즉 댓가를 받고 남의 군역을 대신해 주는 불법 용병 집단이라 할 사람들과 졸지에 “내 대신 네가 왕 노릇 좀 해라.”고 아버지에게 내몰림당한 대체 왕, 즉 ‘대립군(代立君)으로 울렁증 그득했던 소년 ’광해군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백성으로서, 왕으로서 대체재가 아니라 제 발로 ‘서는’ (立) 스토리를 엮어 갔으니까.

그 과정에 배치된 각종 장치들이 그렇게 매끄럽지는 않았어. 선조가 광해군을 해치기 위한 자객들을 보내는 모습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고, 광해가 백성들에게 해 줄 것이 없노라며 소리에 맞춰 어깨춤을 추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느낌이어서 와 닿지 않았어. 영화는 자칫하면 스테레오타잎에 빠질 수 있는 평균대 위를 불안스럽게 걷고 있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나 자신도 보면서 언제 <명량>처럼 헛웃음을 웃게 될까 조마조마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이 영화가 <명량>과 다른 점이라면 사람들의 캐릭터가 다양하게 드러난다는 거였어. 나는 도망갈 테니 너는 싸우라고 해 놓고 그게 혹시 잘 될까봐 자식을 죽이려는 비정한 아비 선조와 그 신하들, 살기 위해서는 모든 걸 다 내주다가 늑대밥이 되는 비겁자, “싸움만 잘하면 오랑캐 땅도 좋다.”면서 대립군들에게 압록강을 넘어가자던 변발한 조선인, 광해군에게 충성스러운 것 같던 대신 역의 김명곤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자고 권유하며 저하를 세자로 만들고자 발버둥친 사람들도 생각을 해 주시오! 식으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에 이르면 더욱 그랬지.

전쟁이란 그런 거니까. 가장 급한 순간 사람들의 본성은 과음 뒤 구토하듯 드러나는 법이고, 가장 고귀한 태도, 가장 저열한 흉도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노출되는 법이니까.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대립군들에 대한 것이었어. 네 말대로 ‘대립군 이야기를 할 거라고 제목까지 지어 놓고 그 사람들의 삶은 그냥 대립군의 말로만 설명해주고 실제로 에피소드나 인물들은 잘 나타나지 않은’ 측면도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오히려 대립군들이 갈라지는 결말을 원했어 실제로 함경도 회령에 귀양가 있던 국경인은 왕자를 잡아 일본군 장수 가토에게 넘겨 버렸거든. “너희들이 내게 해 준 게 뭐냐?” 는 거였겠지.

후일 국경인이 의병장 정문부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도 정문부를 노린 국경인 일당의 습격이 있었을만큼 ‘다른 생각’을 가진 공고한 주변인 집단은 실재했어. 영화 속 대립군처럼 말이야.

그런데 이정재 이하 대립군들은 너무 일치단결하여 광해군을 지킨단 말이지. (한때 배신했던 곡수까지도) 이정재 외에도 대립군 배우들 캐스팅이 좋았던 만큼, 나는 그들의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게 아쉬워. 그 가운데 몇은 일본군에게 붙고 또 몇 명은 도망가고, 나중에는 서로 칼 맞대다가 “왜 이러고 살아?” 서로에게 악을 쓰는 장면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랬다면 네 말대로 “광해군 얘기의 양념”같이 소모된 느낌은 줄었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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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리들리 스코트 감독, 올램도 볼룸 주연의 <킹덤 오브 헤븐>이 떠오를 때가 있었어. 영화 속 강계 전투에서 성벽을 오르는 일본군과 조선 대립군과 승병들의 난전이 펼쳐진 뒤 밤으로 바뀌면서 전투 후의 참혹한 현장을 부감 카메라가 훑는 장면은 바로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 성벽의 일부가 무너진 뒤 기독교군과 무슬림군대가 그 파열구에서 격돌한 뒤의 카메라 워킹, 바로 그것이었거든. 아마도 감독님도 부인 못 할 거야.

기실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등장했어. 예루살렘 왕국의 주력군이 전멸하고 왕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게 포로가 된 상황. 제대로 된 기사들과 병사들 없이 민간인과 노예, 시종, 농부, 무덤 매장꾼까지 잡동사니들을 데리고 기사 발리안이 예루살렘 성을 지키려 하지.

“기사가 없지 않소?”라고 힐난하는 주교 앞에서 발리안은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무릎 꿇라”고 한 후 그 모두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해 버려. 이에 황망한 주교가 또 한 번 고함을 질러. “세상을 바꾸기라고 하겠다는 거요? 기사 작위만 주면 다들 잘 싸운답니까?” 그때 올랜도 볼룸은 날 닮은 표정을 지으며 딱 한 마디를 한다. “Yes.”

영화 속에서 대립군들에게는 ‘무과’(武科)가 일종의 기사 작위로 제시됐지? 무과를 통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대립질’의 운명을 끝낼 수 있다는 욕망이 그들을 이끌었지만 결국 곤죽이 되건 왜군의 밥이 되건 지켜 줘야 할 백성들의 존재를 깨닫는 무력 집단이 됐을 때 대립군은 역시 ‘나의 백성’을 찾는 또 하나의 대립군 광해군의 무력이 되고 그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려. 실제 광해군은 전란 중 수천 명을 뽑는 무과를 시행하기도 했어. 아마 그 속에는 여러 대립군들도 끼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광해군의 시종 무관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고 대립군 리더 토우에게 맡겼던 교룡기는 조선 왕의 상징이었어. 영화의 마지막에서 교룡기에 왜 용이 두 마리인지를 아는가 하는 질문에 이정재가 “하나는 왕 하나는 백성”이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매우 도식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영화의 결론이었을 거야. 제대로 된 리더와 무엇을 하는지 깨달은 백성,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살지 않고 누군가를 대신한 허수아비가 아닌 사람들로 어우러질 때 그 깃발은 의미가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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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영화의 미덕을 본다. ‘스스로 서야 했던 사람들’의 면모를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내고 영상으로 재연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봐. 더하여 겁먹은 어린 광해군이 변모해 가는 과정을 결코 어리지 않은 연기력으로 승화한 여진구의 재발견과 이미 원숙함을 넘어서 보이는 이정재의 연기 앙상블을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 무엇보다 전쟁의 참상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조선’ 땅의 아름다운 풍광은 덤을 넘어선 또 하나의 가치였고 말이다.

그럼 다음엔 또 어떤 영화를 볼지 한 번 들여다보자꾸나.





산하


편집 : 꾸물

from 딴지일보 RSS http://www.ddanzi.com/18689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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