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칼럼]이 사람이 가기 전에 : 한국 현대사의 파도를 타고 넘은 이대용을 아십니까 – 수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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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금천 사람이다. 1925년생이니까 올해로 아흔 셋이다. 해방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사로 일했다. 하지만 공산 정권과는 생래적으로 맞지 않았다. 21세기 한국의 ‘좌파’ 가운데에도 뭐 저렇게 꽉 막혔나 싶은 사람이 있는데 70년 전 ‘인민공화국’의 건설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이야 오죽 견결하고 배타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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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반역자 남조선 괴뢰’와 그 두목 이승만, 김구에 대해 가르치라는 지침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 “그래도 둘은 독립
운동도 열심히 하긴 했다.”고 덧붙였다가 이내 반동분자로 몰리고 인민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을 기다리며 갇혀 있던 중 그는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탈출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38선을 넘는 과정에서 남과 북을 오가며 장사하던 장사꾼들과 함께하는 광경이다. 미군과 소련군의 배치 상황을 훤히 꿰뚫으며 남과 북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며 돈을 벌던 장사꾼들이 1947년 무렵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이념에 끌려 월북했던 서울대생들 몇 명도 그 대열에 끼어 다시 남으로 가고 있었다고 한다. 구사일생 끝에
남한으로 온 그는 군에 입대한다.

6.25 발발 당시 그는 강원도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의 장교였다. 6사단은 한국군 사단들 가운데 초전에서 승리한, 최소한 북한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던 부대 중 하나다. 원래 6사단을 섬멸하고 양평을 거쳐 남한강쪽으로 진출하여
한국군 주력을 포위하여 녹여 버리려던 북한군의 전략은 초장부터 틀어져 버렸다.

그는 이 역사를 바꾼 춘천 전투에서 누가 용맹하게 싸웠고 누가 꽁무니를 뺐으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가 얼마 전 밝힌 것이 한국전쟁 최대의 전쟁 영웅 중의 하나인 심일 소령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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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 소령(전쟁 발발 당시는 소위)은 그와 같은 6사단 소속이었다. 북한군 탱크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올 때 육탄돌격 명령을 받았지만 달아났다. 거기까지는 모르겠는데 그 와중에 금덩이보다 귀한 대전차포 하나까지 버려 두고서였다. 중대장은
총살감이라고 펄펄 뛰었지만 어찌 어찌 포병 연락 장교로 근무했고 이후 중공군과 싸우다가 전사한다.

그런데 이 집 사연이 한국판 라이언 가문이었다. 아들 셋이 죽었고 막내 하나만 남았다고 울먹이는 부모에게 연대장은 훈장을 약속한다. 별 공로가 없다는 보고에 연대장은 육탄 돌격으로 탱크를 까부쉈다는 식으로 그 공로를 조작하여 상신하며 말한다. “우리끼리 알고 있기로 하자.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바로잡자고! 알겠나?”

그런데 이 어머니가 100세로 장수하시며 2005년까지 살다 가셨다. 연대장은 벌써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제야 이 황해도
금천 출신의 왕년의 6사단 장교는 심일 소령의 불편한 진실을 밝힌다.

“우리 군은 과거에 저지른 허위 날조의 오류를 과감하게 바로잡아 정도(正道)를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
예비역 육군 준장 이대용

이 깐깐한 예비역 준장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 굴곡의 가장자리만을 골라 타넘은 듯 파란만장했다. 그는 한국군
가운데 압록강 물을 먹어 본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던 것이 그의 부대였다.

그러나 군에서는 승승장구하지 못했다. 참군인이라 일컬어지는 이종찬 장군을 흠모하여 군의 정치 개입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쿠데타 후 박정희 장군의 부름도 거절했던 것이다. 더구나 군 내부에서 서북 인맥이 영남 군벌들에 의해 신속히 대체되면서 장군 진급에서도 몇 번이나 물을 먹었고 장성 진급 후에도 사단장 한 번 못해 보고 옷을 벗었다.

이후 그는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 유전 파란만장은 오히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위장간첩’으로 유명한, 사실 위장간첩이라기보다는 남과 북의 경직된 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리버럴리스트라 할 이수근(이대용 본인의
주장)을 사이공 공항에서 비행기 속 육박전을 통해 검거한 것이 그였다. 이대용은 월남 대통령과 함께 미국에서 교육받은
친분이 있어, 대통령에게 특별 부탁하여 비행기를 공항에 잡아 놓은 뒤 직접 비행기에 올라타서 이수근을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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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후로도 계속 월남에 있었다. 이른바 ‘월남 패망’, 즉 베트남 ‘해방’ 순간을 적성국 외교관 신분으로 맞는다. 한국 민간인들의 철수를 책임진 그였으나 한 나라가 허물어져 없어지는 북새통 속에 빚어진 착오와 실수를 거쳐 베트남에 억류된다.
장장 5년 동안 베트남의 감옥에서 베트남 정부의 집요한 심문과 북한까지 가세한 ‘전향’ 공작에 필사적으로 맞선다.

그에게 달라붙어 북한으로 가자고 끈질기게 설득한 사람 중 하나는 박영수다. 바로 1994년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남한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 인물. 그 사람이 베트남까지 날아와서 고향의 누님을 만나게 해 주겠다며 이대용을 꼬드겼다.

또 하나 이대용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은 한국어가 유창했던 베트남 관리 ‘튀기’(이대용 일행이 붙인 별명)였다.
툭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하며 이대용을 협박해서 “언제고 죽여 버리고 싶은” 인물이었던 그는 제 3대 한국 주재 베트남 대사로 부임해 이대용을 만난다. 주엉 찐 특 대사였다. 그는 이대용을 만나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이대용 장군이 그때
나한테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으니 외교관 대접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선견지명이 있습니다!” 참 이때 이대용의 심경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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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쓴 책 <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 (기파랑)은 사실 권하고 싶지 않다. 편집도 엉망이고 마치 술자리에서 이대용 공사가 하는 얘기를 받아적은 듯 시점도 왔다 갔다, 6.25 얘기하다가 월남전 스토리 펼치다가 엉망진창이다. 기파랑 출판사가 수구꼴통적 서적을 내기로 유명한 데이기도 하거니와 최소한 자신들의 영웅을 기리는 작업조차 이렇게 무성의하다 싶어서 오히려 슬플 정도다. 에휴 이정도냐 싶고.

그러나 버스 타고 오가면서 훑어본 이대용 공사의 일생만큼은 카메라라도 몇 대 갖다 놓고 찬찬히 그 사연을 들어보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 드라마틱하다. 어떤 인생인들 역사가 아니랴마는 현재 생존해 있는 한국인 치고 그만큼 역사의 드라마의 정점에 서 보았고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 아이러니에 몸서리치며 자신의 과거를 곱씹을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는 이런 기록에 너무나 무관심하다. 기파랑 출판사의 이런 허접한 책으로 그 일생을 담아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일천함을 너무 발가벗고 드러내는 격이다. 아마 ‘진보’ 쪽 사람들은 이대용 같은 이나 얼마 전 돌아가신 채명신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돌아가기 전에 기록해야 할 것들도 무지하게 많다. 그들의 사소한 경험조차 의미있는 퍼즐 조각이고 그들이 웃으며 남기는 ‘여담’조차 어둠 속에서 빛나는 역사의 조약돌이 될 터인데…

참, 기파랑이라는 출판사, 해도 너무한다. 도대체 누구냐 여기 사장이라는 사람은.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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