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한국에서 겪을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 임신중단이라는 “불법”의 문턱에서 – 수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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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초음파 사진


17주 4일이었다. 17주 4일! 평생 이 충격적인 숫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뒤늦게 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회사 화장실에서 확인한 임신 테스트기에는 두 줄이 선명했다. 점심시간에 산부인과를 찾았다. 아랫배에 차가운 크림을 바르고 초음파 기계가 몇 번 더듬자 조그맣게 옹그린 척추뼈가 스크린에 떠올랐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의사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기는 11센티미터 가량, 골격 및 기관이 잘 형성되었으며, 남자아이로 보인다고 했다. 나는 태아를 확인한 순간부터 숨죽이며 울기만 했고 상황을 눈치챈 의사는 주변에 빨리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도저히 초음파 사진을 받을 수 없어 빈손으로 진료실을 나오는데 병원에서 불행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하필이면 자연주의 분만 산부인과에서 임신 진단을 받다니. 비상구를 통해 병원을 빠져나오자마자 주저앉아 오열하는 소리에 직원들이 따라 나왔다. 사정은 모르지만 위로하려는 손길이 이어졌다.


내가 취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취업난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을 즈음이었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수십 번의 서류 광탈, 십수 번의 필기 탈락, 몇 번의 면접 탈락, 한 번의 입사 취소로 1년을 꼬박 채우고 우울증과 자기비하로 폐인이 되기 직전에 잡은 직장이었다. 착실히 포트폴리오를 쌓으며 커리어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 바로 그때, 어처구니 없게도 임신 17주를 진단받은 것이다. 나는 임신중단을 원했다. 싱글의 삶을 헐레벌떡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으며, 해외 장거리 연애 중이던 남자친구와는 이별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몇 주 전만 해도 임신으로 퇴사하는 동료를 일터에서 떠나보냈다. 만에 하나 사장님의 ‘은총’으로 출산휴가를 받는다 해도 세전 150만 원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세 식구 부양은 역부족이었다. 선택지는 낙태 아니면 이민, 둘 뿐이었다. 언어조차 다른 나라에서 별 볼 일 없는 나의 경력은 휴지 조각이 될 게 뻔했고 직장인으로서의 꿈은 사라질 순서였다.


집에서 가까운 산부인과를 검색해 몇 군데 전화를 돌렸다. 중절 시술을 거부한다는 병원은 없었지만, 유선 상담이 가능하다는 병원도 없었다. 무조건 내원이었다. 병가를 내고 대형 산부인과를 찾았다. 중절이라는 말에 상담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의사는 몹시 고압적이었다. 초음파 좀 볼 수 있겠냐는 요청에 그는 괜히 마음만 약해지지 봐서 뭐하겠냐며 딱 잘랐다. 음주, 흡연, 피임약 복용 등 부실한 건강관리가 태아에게 영향을 줬을까 걱정된다고, 혹시라도 장애 가능성이 있을까 묻자 의사는 “그런 가능성에 휘둘려 출산을 결정하지 말라”며 한심하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어쨌든 나는 죄인인 관계로 진료 내내 무언의 냉대를 견뎌야 했고, 낳을지 말지 확실히 하라는 채근 끝에 수납 카운터로 돌려보내졌다. 주수가 찰수록 수술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현금 3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년의 여성 상담원은 나에게 아기가 상당히 큰데 그냥 낳는 게 어떠냐고 했다. 17주차 태아는 기구를 가져다 대면 저도 알고 톡톡톡 튄다면서.


정말로 이상했다. 엄마 되기는 나의 주체성을 아주 많이 포기하는 일이었다. 내 삶의 연속성은 끊어졌다. 바로 몇 달 전의 일들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고, 출산 전의 나와 출산 후의 나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육아의 세계에 맨몸으로 던져졌고, 초신생아와 24시간을 붙어 지내며 젖 먹이기, 잠재우기, 기저귀 갈기 등 생리적 욕구를 보좌하는 데 주력했다. 그동안 남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최소한 그의 생활은 ‘지속’되었다. 그는 다니던 직장에서 근무를 계속할 수 있었고, 혈혈단신 이민 온 나와는 달리 가족 및 동료들과의 소셜 활동을 유지했다. 나는 휴식시간이면 밥을 짓거나 씻거나 쉬느라 바빴는데, 그는 내가 아이를 보는 동안 오버워치에 몰두하고 전자담배 액상을 수집하며 취미활동을 즐겼다. 무너진 터전 위에 새집을 짓고 있던 나와는 달리, 남편에게 결혼과 출산은 기존 생활반경에 새 식구를 입주시키는 수준의 변화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남편 삶의 주인은 여전히 남편이었다.


‘책임지겠다’는 말의 무용함을 생각한다. 파트너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남성은 제법 멋지게 책임지겠다고 말하겠지만, 내 자궁에 태아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여성은 직감한다.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을. 파트너는 법적 혼인 관계를 맺고 당분간 경제적 가장을 담당하며 부양육자 노릇을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이것만으로는 인간의 인생이 책임져지지 않는다. 출산 후 겪게 될 신체적 변화, 육아에 매몰된 일상, 인생의 우선순위 재조정, 경력 단절 및 경력 내리막길은 당사자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과제다.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실패하면서 느끼는 좌절감, 출산을 선택함으로써 포기한 기회비용을 떠올릴 때 몰려오는 상실감을 누가 대신 해소해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을 감수하겠다는 비장의 각오로 임해도 출산은 고통스럽고 육아는 힘들다.


17주 8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출산을 택했다. 심리적 상태, 재정 상태, 배우자의 성향 등 수십 가지 가능성을 머리 터지게 계산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임신중단이 합법이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고, 반대로 내 마음이 중절을 원했다면 그 또한 실행했을 것이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자기 결정’이었다. 나는 고비용의 현금 뒷거래와 음성적 시술의 위험성에서 면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불필요한 심리적 비용들을 치러야 했다. 나만이 주인인 줄 알았던 나의 신체가 국가의 관할 하에 있었음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꼈으며, 법망의 감시를 피해 위법 행위를 계획하면서 죄의식에 시달렸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동정을 받으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인터넷에서는 양육비에 단돈 천 원도 보탤 일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권리를 행사한 여성을 ‘낙태충’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비혼여성에서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두 아이 엄마에서 세 아이 엄마로 변화된 삶의 조건이 발생시키는 엄청난 격차, 그 파괴력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아에는 너무도 쉽게 감정을 이입했다. 몇 밀리미터, 몇 센티미터짜리 가능성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현존하는 삶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비출산을 원하는 여성은 경제적/신체적/심리적 부담이라는 굽이굽이 펼쳐진 고개들 가운데 하나라도 넘지 못하면 임신을 중단할 수 없었고, 이는 명백한 압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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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지 않은 중절 시술로 매년 47,000명의 여성이 사망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성더러 무조건 출산으로 피임 과실을 책임지라고 비난하는 여론을 심심찮게 본다. 낙태 금지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모두 생명을 너무나 존중하는 것일까? 나는 낙태 경험이 있는 여자와는 만나기 싫다고 말하는 남성들, 결혼 전 파트너의 낙태 사실을 알고 파혼하는 남성들, 낙태 전적이 이별 사유이며 이혼 사유라고 말하는 남성들을 온/오프라인에서 수두룩하게 봐 왔다. 반면 남성끼리 낙태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에서 ‘미래의 결혼 상대자에게 반드시 이 사실을 고지하라’, ‘너의 몸이 더러워졌으니 결혼은 꿈도 꾸지 마라’고 비난하는 장면은, 세상에 그런 건 없다. 낙태 금지의 규칙은 처녀성을 지키지 못한 문란한 여성, 거기다 임신까지 해서 더는 ‘새 자궁’이 아닌 여성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은 출산으로 전과를 남겨 무고한(?) 피해자를 없애야 한다는 아우성이 태아 생존권이라는 도덕적 요구로 둔갑하는 것이다. 혼자 한 임신도 아닌데 남성은 낙태라는 낙인에서 너무도 자유롭다. ‘싸튀충’이라는 미러링조차도 사실상 질내사정 후 ‘잠수’를 타는 행위자만을 제한적으로 지칭한다. 상황을 불문하고 중절 경험만 있으면 ‘낙태충’이 되는 여성과는 대조적으로.


이쯤에서 누군가는 임신과 낙태를 직접 감당하는 것이 여자의 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여성이 출산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임신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 앞에서 여성은 출산과 중절이라는 두 가지 해결책을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고, 누구도 이 선택을 비난할 수 없어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낙태 관련 규정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모자보건법 제14조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이다. 한국에서는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면 임신 상태를 지속하거나 불법 시술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감당해야 할 부담과 수술비가 치솟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동의까지 기다려야 하다니, 국가와 남편이 허락해주는 임신중단만이 합법이라니! 현행법은 임신과 출산 이슈에서조차 당사자인 여성을 심각하게 객체화하고 있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호주에서는 주마다 다른 낙태법을 적용하지만, 파트너에게 고지할 의무나 동의가 필요한 곳은 없다(미성년자에 한해 부모 동의가 있어야 하는 서호주 주 제외). 중절은 산모와 의사의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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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주요 국가들의 출산율(2012)


퀸즐랜드 주와 NSW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인공임신중절이 합법임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출산율은 높은 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노동정책분석실의 <월간 노동리뷰> ‘여성 고용률과 출산율 국제비교’(2014.9)에 따르면 OECD 가입국 가운데 호주의 출산율은 멕시코, 아이슬란드, 뉴질랜드, 프랑스에 이어 5위를 기록했다. 또 다른 분석에서 여성고용률과 출산율은 정비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호주는 여성고용률이 중위권에 머무름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유독 높은 케이스였다. 나는 이것이 호주의 각종 출산 지원 제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NSW 주의 경우 일반 가족 수당(Family Tax Benefit A, B)부터 장애아 양육수당(Carer Allowance), 동성부부 양육수당(Dad and Partner Pay), 고아수당(Double Orphan Pension), 육아휴가 수당(Parental Leave Pay), 저소득층 육아수당(Parenting Payment), 학대아동수당(Special Child Care Benefit), 어린이집 지원(Child Care Benefit/Child Care Rebate) 등 다양한 육아 환경에 대비한 양육 수당이 세분되어 있으며, 한부모 가정일 경우 심사를 거쳐 매 2주 최대 748.10달러까지 지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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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국가들의 여성 고용률과 출산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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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 자녀양육 시 가장 어려운 점


이에 비해 한국의 미혼모 복지 현실은 처참하다. 여성가족부의 ‘미혼모의 양육 및 자립 실태조사 연구(2010)’에 따르면, 미혼모의 월평균 급여는 105.3333만 원이고 미혼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미혼모 가정은 4.7%에 불과했다. 미혼모들은 자녀 양육 시 가장 어려운 점으로 ‘양육비, 교육비 등의 비용부담(63.1%)’을 꼽아 미혼모 가정의 전반적 생활고를 가늠케 했는데, 2016년 7월 발표한 한부모가족정책안내서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어린이집, 유치원, 종일제 아이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은 0~5세 아동의 경우’에 한해서만 월 10만 원~20만 원의 가정양육수당을 지급할 따름이다. 또한, 연간 70만 원을 제공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병원비 포함 양육용품 비용마저 중위소득 52% 이하의 수급자라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받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혼자 출산하고 육아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아이는 절대로 ‘낳아 놓으면 알아서 자라지’ 않는다. 아이들은 양육자의 세심한 보호, 배려, 교육이 필요하고, 적기에 맞는 서포트와 투자를 받으면서 사회화된다. 물질적 궁핍은 양육자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고, 원하지 않은 출산은 학대로 이어지기 쉽다. 소득이 낮은 부모가 출산하면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 될 텐데도, 한국 정부는 합당한 복지 시스템을 갖추기보다 생명윤리에 기대어 출산을 장려해온 것이다. 날로 극심해지는 낙태 여성을 향한 혐오를 모른척하며 여성을 당위적 재생산으로 떠밀어왔다.


낙태를 반가워하는 여성은 없다. 아무런 일도 없던 내 인생에 신체적 내상과 트라우마가 찾아오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간혹 중절 소감을 ‘기뻤다’라거나 ‘홀가분하다’고 표현하는 여성들이 있지만, 이는 본인 인생의 통제불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느끼는 평화일 뿐이지 희열과는 다른 감정이다. 나는 반드시 낙태만이 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인생의 방향을 통째로 수정하더라도 출산을 결심할 (나 같은) 여성도 있으니까. 진짜 문제는 여성의 주체적 선택을 방해하는 낙태법과 모자보건법 및 육아 환경이다.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고, 낳기 싫어도 낳아야 하는 모순 속에서 여성 개인에게 뒤처리를 맡기는 부조리함이다. 정부가 진실로 생명권을 존중한다면 원치 않는 임신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 몸은 내가 지키자’는 의미 없는 구호가 아니라 남녀가 함께 책임지는 피임 교육을 실시하고, 성폭행 및 강간 범죄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사회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한부모 가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실효성 있는 육아복지의 확대로 출산 어드밴티지를 주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보장해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 이 조건을 다 충족하고 나서, 그때 여성의 의사를 ‘물어보길’ 바란다. 낳을래, 말래. 싫다면 어쩌겠는가. 그래도 이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낙태법이 천 년을 존속하더라도 임신중단을 단행할 여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임신중단이 합법이라도 키울 여력만 되면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택할 것이다. 사실은 이런 논의까지 전개할 필요도 없는 주제다.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언제나 참이므로.




탱알

트위터: @taeng_al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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