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를 위한 변명-주관이 없는 영혼에 자라나는 것들 – 수다피플

<변명부터 하고 시작하자>

공교롭게도 할 말이 있다.

나는 여혐을 혐오한다.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라는 생물학적 특징이 사회적인 양상으로 터져나오는 일반성이 분명 있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특별한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내가 일하는 곳에도 여자들이 많이 있고, 그들 나름의 장점으로 상당히 훌륭한 성과를 낸다.

메갈이나 맘충 논쟁으로 대표되는 여혐은 내가 봤을 때는 전형적인 침소봉대이자 나약한 남자들의 두려움을 공격성으로 드러내는데서 나오는 현상이다. 이상한 여자들이 극소수라든가 그들 특유의, 단점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대부분 납득할 만 한데 더 큰 틀에서 생겨난 문제점을 ‘여성’이라는 국소부위에 대한 공격으로 해소하려고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매우 공교롭다.

여교사, 특히나 “초등학교 여자 교사”에 대한 요즘 세간의 인식에 대해 나도 한마디 보태고 싶은 것이다. 나는 여혐주의자들의 편견과 매우 같은 방향으로 할 말이 있다. 그것은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내가 실제 당사자로서 겪은 일이기 때문에 굳이 다르게 말 할 필요가 없다. 초등학교 여교사는 굳이 조심스럽게 “일부 몰지각한”이나 “대다수 선량한분을 제외하고”같은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이 전반적으로 형편없는 인간 군상이었다. 일부 선량한 분들에게 죄송하게도.

그럼에도 나는 여혐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여교사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비록 여교사가 매우 큰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어떤 특징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는 것도 한편으로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 그런 꼴을 보았는가?>

국민학교를 개근상도 없이 졸업한 이후, 초등학교 교사는 내 삶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가끔 스쳐가는 사람들이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별다른 관계는 없었다.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나 자산의 찌질함과 맞물려 그저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다 옛날의 일이었고 스물 몇 살을 보낼 때 까지 구태여 그때의 일을 반추할 필요가 없을 만큼 젊음은 다이나믹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의 초등학교 여교사 친구의 대학교 친구와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여자와의 관계를 “소개팅하고 몇 번 만난 사이”라고 지금 정의하고 있다. 비록 그때는 고백하고 사귀기로 하고 ‘내가 첫 남친이다’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심지어 주선자를 통해 내게 고백을 종용하는 일도 있었으며 백일기념 선물까지 나눴지만 몇가지 찌질한 문제들로 다 끝나버렸다. 그럼에도 “전 여친”이 아니라 “소개팅하고 몇 번 만난 사이”라고 굳이 말하는 것은 그 여자가 과거 알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그 표현을 썼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다른 곳에서 만난 남자에게 나 역시도 “소개팅하고 몇번 만난사이”라고 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될 만큼, 초등학교 여교사는 폐쇄적인 집단에 있다. 내가 만났던 아주 작은 케이스를 가지고 일반화 하는 것이기에 위험하기는 하지만 폐쇄적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일도 일찍 끝나는데 왜 그렇게 좁은 사회 속에서만 사는지 모르겠다.

<대놓고 그런 말 하는 사람 처음봤다>

세상엔 속물이 많다지만, 그렇다 해도 어지간히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요새 교대생 및 초등학교 여교사에 대한(남교사가 상대적으로 정상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쁜 평가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대로 믿어도 별 문제가 없다.

그 여자는 놀라울 정도로 자기 안의 생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런 말보다 그런 말을 하는 태도가 놀라웠다. 뒤에 더 이야기 하겠지만,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일단 확고한 것 하나는, “여자로서 초등학교 <여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것”은 엄청난 벼슬이며 자랑이라는 것이다.(“여자로서”와 “여교사”라는 말이 중복된 표현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그 여자에게 “초등학교 여교사”와 “기타 등등 교사”는 다른 클래스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쓸 수 밖에 없다)

1. 최소한 “사”짜 붙은 직업과 결혼은 아무것도 아니다.
2. 정 못해도 5대기업 정도는 되어야 한다
3. 동료 교사들끼리 결혼할 때 아는 교사가 남자면 “땡잡은거”고 반대로 여자면 “실패한 것”이다(난 그때 어려서 이런 인식을 직장 동료에 대해 가진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4. 퇴근이 빨라 애들을 키우는데는 최고다(그런 마인드로 애들을 제대로 키우겠느냐마는)
5. 동료 교사랑 결혼한 다른 여자들은 같은 일 하는 주제에 집안일은 하나도 안하는 남편 교사 때문에 고생이다(사실이면 틀린말은 아니다만, 그냥 불만이 아니라 “여교사랑 결혼한 주제에 분에 넘친 줄 모르고”라는 뉘앙스가 가득하다)
6. 남자는 최소한 내가 버는 돈 보다 두배 이상은 되어야 한다(나는 백일동안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 일이다만 쓰다보니 짜증이 좀 난다. 뭐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인생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이들에 대한 인식도 놀랍기는 진배없었다. 내뱉는 말들이 하나같이 충격적이어서 다 쓰진 못하겠고 가장 인상적었던 것은

“빌라에 사는 애들은 아파트에 사는 애들보다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세상물정을 몰랐던 것이 아파트가 그렇게 대단한 건축양식인줄도, 빌라가 더 저렴하고 치안도 좋지 않으며 수준마저 떨어진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친구중에 결혼한 사람도 있었는데 부자였기 때문인지 그런 소리는 들어본 일도 없다. “애들을 그런식으로 나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내가 되묻자 조금 머쓱해 하기는 했다.

내가 그 여자로 인해 초등학교 여교사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굳힌 것 처럼, 실제 빌라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아파트 아이들보다 떨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쌍문동의 주택가에 살았는데, 그러고 보면 2학년 때 담임은 뭔가를 안 한 아이들을 세워놓고 “하여간 창동 사는애들은 안 그런데 쌍문동 사는 애들이 문제야”라고 대놓고 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쌍문동 사는 애들이 전반적으로 공부는 못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어딘가에서 어느 초등학교 여교사와 어떤식으로든 관계를 맺을 일이 있다면 그런 인식을 접어놓고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분명 속물에 세상물정 모르는 부적응자겠군요”라고 의식적으로 전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여자도 빌라사는 아이들을 처음 대할 때 당연히 그 정도는 해 주길 바라지만 불행히도 전망은 별로 밝지 않다.

<그 여자들의 사정>

사실 그 여자는 나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독한 사람도 아니었다. 백일간 손만 잡고 다녔지만 어쨌든 나는 미숙한 표현이나마 사랑받았고 준 마음보다 받은 것이 더 많았다. 비록 나는 속물이 아니었지만 그 전에 받은 상처 때문에 사람을 별로 깊게 좋아하지 못했다. 그 여자는 내 직업이라는 조건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쿨한척 하려는 태도 너머의 마음을 나는 귀여워했다.

나의 순진함은 조건 위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마냥 믿었던 것이다.

그 여자의 순진함은 지독한 그 순진함 자체가 독이었다.

악한 행동을 아이들에게 하겠다는 의도 같은 것은 전혀 없을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이 악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순진과 순수는 다르다. 순진한 사람은 상처받고 더러워지지 않은 것이고, 거기에 나쁜 경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순수한 악이 될 수도 있다. 순수 자체는 일단 상처받고 더럽혀진 뒤에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별 생각없이 여자들에게 좋다는 교대에 가서 같은 직업을 가지려는 사람들과 고향인 광주에서 20대 초반을 보냈다. 임용고시에 한 번 낙방하고 경기도 교육청의 교사가 되었다. 서울이 좋다고는 하던데 한 번 미끄러진 뒤에 그런 선택은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더 넓은 세상 같은 것은 경험할 일도 없이 살다가 들어간 학교에서 듣는 이야기들.

동료 “여교사”들의 인생 이야기들, 마냥 선하지마는 않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이야기, 고작 셋 뿐이지만 다른 곳에서 교사가 된 친구들 이야기, 순진하기만 한 그 여자.

그 안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질 수 있을까?

<교대와 사범대가 커맨드센터요 배럭이자 팩토리다>

초등학교 여교사라도 다를 수 있다.

더 공부하고, 읽어들이고, 여행하고 세상을 넓히며 스스로의 주관을 가진다면 말이다. 옳고 그른 것과 가치관에 대한 태도 등이 박혀있는 자리에서는 자신에게 펼쳐지는 세계에 대해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스스로의 노력 외에도 사람들과의 교류 역시 누군가의 세계를 넓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종교배는 종을 강하게 만든다. 생식 뿐만 아니라 지적인 교류 역시 그러함은 자명하다. 나를 적어도 마음으로는 사랑 해 주었고 나 역시 마음을 열고자 했던 그 여자 역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기회가 필요했다. 꼭 나랑 잘 안되어서가 아니다. 애당초 나한테 관심도 없었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교대와 사범대는 없어져야 한다. “안정적인 삶”을 찾아 온 씨없는 바나나나무 같은 것들끼리 모인 집단이다. 특별히 우수한 인재가 모이는 것도 아니고, 항상 말이 많은 공교육의 경쟁력을 생각하면 좋은 교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갖춘 것도 아니다. 파나마병에 멸종해버린 “그로미셸”바나나처럼 지적인 동종교배를 통해 생겨난 나약하고 끔찍한 집단이 오늘날의 교사들이다. 학교에서 대충 짧은, 매너리즘으로 채운 일과를 마치고 시댁 욕과 남편의 벌이, 애들 학원, 명품 브랜드에 대한 조예를 깊여가거나 배구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도장으로 찍은 “참 좋았어요”마크마냥 태어난다.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경쟁이 치열한 학원에서 살아남은 강사들은 사범대 출신과는 별 인연이 없다. 가르치는 것을 더 잘하는 일의 비결이 사범대와 교직이수에 있지 않음은 자명하다.

여교사들도 “누구는 동시예식으로 결혼했고 아파트에 들어갔는데 나도 실패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에 골몰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게 해 줘야 한다. 교육제도의 실패는 교사들의 인생도 매우 단조롭게 만든다.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한 여교사도 일단 모이면 시댁이나 남편은 씹고 본다. 이 정해진 실패의 길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여교사들, 그리고 나의 그 여자의 폐단은 그 스스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그렇게 된 여교사들을 젠더라는 틀에 갇혀 여혐으로 공격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갈등만 심해질 뿐이다. 이 실패한 사범대, 교대 시스템의 고장난 컨베이어 벨트를 당장 멈춰야 한다.
 

from 딴지일보 RSS http://www.ddanzi.com/secretsofkim/195506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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