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바리 부인 – 수다피플

보바리 부인

(구스타브 플로베르/민희식. 동서문화사, 2008(1978). 379쪽)

 

 

망각 너머로 장면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바리 부인을 다시 만났다. 나이가 들어 만나는 그 여자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다. 욕망과 허영으로 똘똘 뭉친 여자, 남편을 경멸하고 혐오하면서도 그 재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 털어먹은 여자,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내던지고도 결국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버림받고 빚에 내몰려 자살한 여자, 그게 보바리 부인이다. 이 소설에는 19세기 중엽 프랑스 쁘띠부르주아 계급의 타락하고 위선에 찬 삶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엠마는 시골 지주의 딸이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낭만적 소설을 통해 삶과 사랑에 대한 온갖 환상을 키워왔다. 그리고 그런 환상은 그녀의 반항적인 기질과 결부되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조건을 경멸하고 터무니없는 꿈에 매달리도록 부추겼다. 그녀는 상류사회의 화려하고 풍요한 삶, 모두가 그녀를 숭배하고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삶을 꿈꾸었다. 그런 그녀가 샤를르라는 평범한 시골 의사를 만난 것은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아직 순진한 시골처녀인 엠마에게 샤를르는 잠시 단조로운 삶의 탈출구가 될 수는 있지만 그녀가 지닌 욕망에 비해 그는 야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 너무나 초라한 남자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남자를 물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더 큰 세상을 보지 못했고 상상 이상으로 사랑의 격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에 눈을 뜨는 순간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격정에 빠져든다. 그건 어쩌면 엠마의 성격상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샤를르는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활달한 성격도 아닌데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그렇고 그런 아이였다. 다만 그를 성공시키려는 어머니의 노력으로 그는 간신히 의사가 되었고 또스뜨라는 시골에서 개업했으며 어머니가 정해준 그보다 한참 나이가 많고 아주 못생긴 과부와 결혼했다. 그러니 결혼 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나마 아내의 재산관리인이 그녀의 돈을 갖고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그녀가 약속한 지참금은 날아가 버렸다. 이래저래 운이 없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운명이 버려두었다면 그는 주어진 상황에 그럭저럭 만족해서 살았을 것이다.

 

어느 날 베르또 마을의 루오라는 사람이 다리가 부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왕진을 간 그는 루오의 딸 엠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날부터 루오의 치료를 핑계로 일주일이 멀다고 그 집을 드나들게 되지만 곧 눈치 빠른 아내의 질투심 때문에 발길을 끊어야 한다. 그런 사이 지참금 때문에 시부모와 심하게 싸운 후 지병이 재발한 아내가 빨래를 널다가 피를 토하며 죽게 되자 그는 아내에게서 해방되고 마침내 엠마에게 청혼한다.

 

결혼 후 그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아내 역시 그를 사랑하고 결혼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멋대로 믿어버린다. 그러나 엠마는 아무런 자극도 없는 결혼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너무나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남편에게도 실망한다. 그런 지루한 생활 가운데 남편이 치료해준 적이 있는 한 자작의 집 파티에 초청을 받아 며칠 다녀온 후 그녀는 완전히 변한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귀족들의 삶을 목격하고 경험함으로써 그녀의 욕망에 드디어 불씨가 당겨진 것이다. 그녀는 그날부터 화려한 삶의 환상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동경하며 그만큼 자신의 현재의 삶에 더 환멸을 느껴 병이 난다. 이제 시골 생활은 그녀에게 고통일 뿐이다.

 

그들 부부는 환경을 바꾸기 위해 용빌르라는 좀 더 큰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엠마는 딸을 낳는다. 그러나 엠마는 아이를 가난한 유모에게 맡긴 채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 않고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레옹이라는 청년을 만나 플라토닉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랑을 견디지 못한 레옹이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면서 그녀의 어설픈 사랑은 끝나게 된다. 레옹이 떠난 후 그녀는 다시 병을 얻게 되며, 그녀의 텅 빈 마음을 파고 든 사람이 바람둥이 지주인 로돌프이다. 그녀를 보고 첫 눈에 반한 그는 그녀를 유혹해 마침내 정부로 만들며, 그때부터 그녀의 잠들어 있던 성적 본능이 격렬하게 폭발한다.

 

로돌프와 애정행각을 벌이면서 그녀는 병적으로 그에게 집착하게 되고,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갈증에 시달린 그녀는 마침내 남편을 버리고 그와 도망을 치기를 원해서 로돌프도 마지못해 동의한다. 그러나 도망을 치기로 한 날 로돌프는 그녀를 배신하고 혼자 떠나 버린다. 그가 배신한 것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다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더욱이 샤를르는 그 마을의 절름발이를 수술하려다가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사고를 쳐서 의사로서의 신뢰마저 추락한다. 그런 남편에게 마지막 희망을 포기한 엠마는 로돌프를 잡기 위해 돈을 함부로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는 남편과 함께 인접한 대도시인 루앙에 연극을 보러 가서 레옹을 다시 만나게 된다. 레옹은 더 이상 예전의 순진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녀를 차지할 결심하며, 그의 유혹에 넘어간 그녀는 다시 한 번 격렬한 사랑의 불꽃을 태운다. 그러나 레옹과의 재회도 오래 가지 않아 레옹은 그녀의 광적인 집착에 질려 도망치려하고 이것이 엠마를 더욱 미치게 만든다.

 

한편 그녀가 용빌르로 이사 온 후 뢰뢰라는 포목상은 그녀에게 끈질기게 접근해서 그녀의 허영을 부추기면서 온갖 종류의 사치품과 물건을 떠안기게 되고, 경제적인 개념이라고는 없는 그녀는 뢰뢰의 술수에 말려들어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그녀는 남편 몰래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고 남편의 재산을 비밀리에 하나씩 처분하지만 빚은 점점 더 늘어나 파산에 이르게 된다.

 

마침내 어느 날 집에 집달리가 들이닥쳐 가재도구가 모두 차압되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진 엠마는 레옹과 로돌프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불륜이 어떤 파국을 초래했는지 깨닫고 비소를 먹고 자살한다. 그 후 샤를르는 우연히 아내의 편지 뭉치를 발견하면서 그녀의 불륜을 알고 충격을 받아 곧 죽게 되고 딸 베르뜨는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고모의 손에 넘겨지지만 가난한 고모는 그녀를 면사 공장에 공원으로 보내버린다. 아마 이 소설에서 가장 가여운 인물은 베르뜨일 것이다.

 

플로베르는 엠마라는 인물을 통해서 낭만적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시대는 바야흐로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역시 젊은 시절 낭만주의 소설에 익숙하였으며 그런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바리 부인>은 그의 낭만주의적 경향과의 결별일 수도 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환상에 사로잡힌 엠마는 환상을 쫒다가 비참한 삶의 종말을 맞이한다. 이미 시대는 엠마와 같은 서투른 낭만적 사랑과 열정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시대는 이미 약제사 오메와 같은 지독한 속물과 뢰뢰와 같은 파렴치한 인간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 시대에 샤를르 같은 어리숙한 의사나 엠마와 같은 현실을 떠나 정열에 취한 사람들이 발붙일 공간은 없다.

 

물론 엠마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실재 소설을 읽으면 엠마의 행위와 사고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와는 동떨어진 환상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그녀는 허영과 사치와 기만 속에서 삶을 살다가 끝내 낭만적인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릇된 꿈의 희생자이다. 더욱이 그녀는 사랑의 숭고함으로 인해 자살한 것이 아니라 빚에 몰려 자살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의 아이러니이다. 그녀는 사랑의 순교자가 아니라 현실의 빚더미에 깔려 죽은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엠마는 꿈을 꾸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물론 그 꿈이 주위 사람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자기 삶을 파멸로 이끌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열망에는 순수한 생명력이 내재해 있다. 그런 생명력이 없이 살다간 대다수의 인물들에 비하면 그녀의 삶은 불꽃같았다.

 

그 시대에 남다른 열정과 격렬한 성격을 타고난 여자에게 허용된 것은 불행하게도 조신한 아내와 어머니로 숨을 죽이고 살아가든가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위험한 모험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 시절 여자가 정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술에 혼을 불태울 수도 없었다. 그 시절 여성에게는 교육을 비롯한 거의 모든 것이 봉쇄되어 있었다. 더욱이 시골에서 자랐으며 현실에 무지한 그녀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그녀의 생명력은 성적인 욕망의 추구와 방탕에서 출구를 찾았고 격렬하게 불탔다. 그녀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아마 낭만적인 허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쩌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새롭게 출현한 신여성의 선구적 인물인지 모른다. 시대에 저항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친 각성된 여인들 말이다. 가부장제 체제에서 자신의 재산권을 지키고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여성으로서 이전에 인간으로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고, 사회에 진출해서 직업적 성취를 추구한 여성들, 아마 그들의 원형적 인물이 엠마가 아닐까? 물론 그녀의 삶은 지독한 이기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채 왜곡되고 변질되긴 했지만 그 속에는 변화하는 시대에 변화된 삶을 갈구하는 여성들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그녀들의 욕망과 좌절이 있었기에 그것이 쌓이면서 느리게나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가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너무 엠마를 띄우는 건가?

from 딴지일보 RSS http://www.ddanzi.com/nimaeumdaero/19570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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